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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로를 거닌 사람들] 배병민 대구시립국악단 수석 단원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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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대신문-천마로를 거닌 사람] 배병민 대구시립국악단 수석 단원
취재 : 이경희 기자, 지민선 기자 lkh1106@ynu.ac.kr, jms5932@ynu.ac.kr
 
국악과 99학번 배병민 동문, 대구시립국악단 소금 수석 단원
열악한 환경에도 대금을 놓지 않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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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대학교 국악과를 졸업한 배병민 동문(국악과99)은 현재 대구시립국악단 소금 수석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지난 2015년에는 대금 독주회를 열기도 했으며 많은 연주자들과 협연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이에 배병민 대금 연주자를 만나 대금 연주자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대학 생활, 그의 목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본인을 간단하게 소개해주세요
 제 이름은 배병민이고, 영남대학교 99학번으로 입학해 대금을 전공했어요. 현재 대구시립국악단에서 소금 연주자로 활동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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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절에서 불교 학교를 갈 일이 있었어요. 대략 3년 정도를 다니며 목탁도 치고 여러 활동을 접할 수 있었죠. 그러던 와중 어떤 선생님께서 단소를 가르쳐 주셨고, 이 일을 계기로 단소를 배울 수 있었어요. 단소를 배우다가 중학교 2학년 설날에 친척들에게 받은 용돈으로 플라스틱 대금을 사서 연주하게 됐고, 취미로 배우던 대금이 어느 순간 제 전공이 돼 있더라고요.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할 즈음인 중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서 넌 머리가 좋으니까 공부를 해봐라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단박에 싫어요라고 대답했죠. 예술고등학교(이하 예고)에 진학하고 싶었으니까요. 이 얘기를 들은 선생님은 바로 제 부모님을 호출시켰어요. 어머니는 제 꿈을 지지해주셨고, 그렇게 예고를 가게 됐어요.
 
우리 대학교 국악과에 입학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고등학교 2학년 때, 우연찮은 계기로 경북 도립국악단과 협연을 하게 됐어요. 거기 지휘자 선생님이 현재 퇴직하신 영남대학교 교수님이셨어요. 그때를 계기로 우리 대학교에 관심을 가지게 됐죠. 집이 가난하던 탓에 어머니께서는 국립대인 경북대학교에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하셨어요. 하지만 좋지 못한 성적과 처음부터 영남대학교에 관심이 있던 저는 영남대학교에 합격하게 됐고 어머니께는 1학기분의 등록금만 내주시면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다고 설득시켰죠. 우여곡절 끝에 우리 대학교에 오게 됐어요.
 
대학 시절에 가졌던 목표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대학교 2학년 전까지는 목표랄 게 없었어요. 금전적으로 부족한 탓에 굉장히 바쁘게 살았기 때문이죠. 수업은 수업대로 다 듣고 레슨하고 밤 9시부터 새벽 5시까지 편의점 알바를 하기 바빴어요. 그때 시간당 1,900원밖에 받지 못했어요. 밤에 잠을 잘 수도 없었고 일하고 공연하고 돈 버는 것에 급급했던 때였죠.
당연히 공부에 소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재학 중 1.95라는 좋지 못한 성적을 받은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대회를 나가고 상을 받게 되며 삶의 목표를 찾기 시작했고, 이러한 과정을 학과 교수님께서 많이 도와주셨죠. 또한 석사, 박사 과정을 전부 우리 대학교에서 밟게 됐는데 그제야 공부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본인에게 영남대란?
 전 뼛속부터 영대인이에요. 속된 말로 영남대 빠라고 할 수 있죠. 대학을 졸업하면 학교에 올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건 제 착각이었어요. 99년부터 지금까지 19년을 계속 학교에 나오고 있어요. 그렇다 보니 당연히 학교에 애정을 가지게 됐고, 후배들에게는 뭐든 다 주고 싶은 공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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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구시립국악단 소금 수석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수석 단원이 되기 위한 과정은 무엇이고 어떤 역할을 하나요?
 가야금, 거문고, 피리, 아쟁 등과 같은 다른 파트는 파트 단원들이 8~9명 정도 되요. 그 단원들을 2년에 한 번씩 오디션을 봐요. 실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단원에게는 경고를 부여해 정해진 기간 뒤에 다시 오디션을 보죠. 또한 그 오디션에서 성적이 가장 좋은 사람에게는 수석을, 그 다음으로는 차석의 자리를 주며, 수석이 그 파트의 책임자가 돼 단원들을 연습시키고 있어요.
하지만 소금은 1명의 단원만 모집해요. 파트 단원이 혼자라고 무조건 수석을 주는 것은 아니에요. 오디션을 봐 성적순으로 수석, 차석, 평단원을 받게 되고 실력이 좋지 않을 경우에는 경고가 부여되기도 해요.
 
대금 연주자로 활동하며 힘든 점은 없었나요? 그리고 그러한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나요?
 연주자, 예술인으로 힘들 때는 공연이 많을 경우 그 공연을 모두 완벽히 해내기 위해 힘들어요. 몸이 힘들죠. 하지만 그건 정신적으로 힘들지 않아서 괜찮아요. 정신적으로 힘들 때는 내가 노동자인가? 예술인인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 문장은 제가 직장에 입사하기 위해 면접을 볼 때 받은 질문이에요. ‘배병민 씨는 대구시립국악단원이 노동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어요. 저는 단호하게 대구시립국악단원이 노동자라고 생각한다면 이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라며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죠. 노동자라고 생각한다면 돈을 쫓아가야 하고 예술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음악만 하면 돼요.
 
국악인으로서 국악 철학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음악에는 전통 국악과 창작 국악이 있어요. 요즘에는 크로스오버, 퓨전 등이 유행하잖아요. 제가 부족해서 이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창작 국악을 연주하지 않아요. 직장에서는 관현악과 함께 무대를 준비하며 창작 국악을 연주하기도 하지만 저의 음악을 할 때는 전통 국악만 해요.
전통 국악만 평생 해도 전통 국악이 가지고 있는 본래 철학을 10분의 1도 이해를 못 할 것이고. 평생 하면 맛이나 볼까 할 정도라고 생각해요. 또한 전통 국악을 완벽히 할 줄 알아야 창작 국악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전통 음악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창작 음악을 한다는 것은 한국인이 한글을 완벽하게 하지 못하는데 영어를 하는 것과 같은 것과 같은 개념이죠. 저는 매우 보수적이라서 모든 일에는 순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기초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앞으로의 구체적인 계획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제자들을 잘 키우는 게 저의 목표이자 계획이에요. 제가 생각하는 선생님이란 제자가 직업을 가지고, 집을 장만하고, 결혼을 해야 스승으로 해야 할 도리를 다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제자가 잘된 걸 보면 너무 뿌듯해요. 그래서 정말 열심히 가르쳐서 저보다 더 뛰어난 제자를 많이 육성시키는 게 저의 가장 구체적인 계획이에요.